식민지 조선내 최대 규모의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일제 패망 후 어떻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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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내 최대 규모의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일제 패망 후 어떻게 되었나?
  • 박인식 KCJ 국제관계연구소 소장
  • 승인 2015.08.1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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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식 KCJ 국제관계연구소 소장
1905년 을사늑약 이후부터 일제 식민지시대를 걸쳐, 8, 15해방 조선민족의 최대의 여론 왜곡과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 조선 지식인들의 친일회유를 일삼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거대 언론사 경성일보는 일본 패망과 함께 어떻게 조선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나?

1906년 9월1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창간
한일병합 당위성 홍보, 지식인들 회유와 친일파 육성 홍보, 독립운동가 억압과 탄압에 앞장선 신문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어떤 신문인가?
한국의 일제식민지 기간 중, 조선총독부의 3개의 기관지 일본어『경성일보』, 한국어『매일신보』, 영어『서울프레스』(The Seoul Press) 중에서도 『경성일보』는, 당대의 신문 중에서 그 규모와 영향력이 컸던 신문이었다. 게다가, 『경성일보』의 임원은 영향력이 있었던 일본 정치인이나 지식인, 언론인이 많아 총독 정치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식민지기의 총독부 다음으로 권력과 권위를 가졌던 기관이다.

『경성일보』는 통감부 초기에 창간되어, 조선식민지의 전 기간과 패전후, 10월31일 (1945.11.1-12.11:한국인에 의한 발행 및 소멸)까지 거의 휴간이 없었던 식민지기의 유일한 신문이다.
일제는 식민지통치기관의 기관지로서, 조선의 『경성일보』 이외에도 대만의 『대만일일신보』 (1898-1944), 만주에서는 『만주일일신문』 (1907-1944), 그리고 사할린의 『화태일일신보(樺太日日新聞) 』1908-1942)등을 발행했다.

이들 신문은 일제의 대륙침략의 홍보와 식민지통치의 정치 선전을 목적으로 발간된 것이다. 그 때문에, 『경성일보』 (당시 발행장소, 경성 태평통 1 정목)는 1906년 9월 1일에 자본금 16만엔의 합자 회사로 출발했다. 조선내의 일본인을 위한 신문이라기 보다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조선통감:1906.6-1907.7)가 조선인과 구미인을 대상으로 조선지배통치의 홍보용으로 창간한 신문이었다.

일제 패망 직전의 『경성일보』상황
일제는 태평양 전쟁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던 1944년 여름, 신임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조선총독(1944.7.24~1945.9.28)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 (1944.7.24 1945.10.24)의 요청에 의해, 『경성일보』의 최후의 사장으로서, 요코미조 미츠데루(横溝光暉)(1944.9.23)가 취임한다.
요코미조는 1921년10월에 동경제국대학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후, 1927년에 내무사무관, 1937년에 내각정보부장겸 내각서기관, 1940년에 오카야마(岡山)현 지사, 1942년에 구마모토(熊本)현 지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1944년 요코미조가 취임 당시, 『경성일보』창간 40년이었기 때문, 40주년 기념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 그 구체안을 사내에서 모집했다. 그 결과, 「경일 40년사의 편찬」, 「조선 백과사전의 편찬 간행」, 「경일 문화장 제정」, 「글라이더를 중학교 기증 활동」이라는 안이 채용되었다. 또, 요코미조 자신이 주창해, 「경일신문 연구소의 창설」, 「경일 농원(보양소 겸) 설치」, 「경일 보건소의 설치」등의 세개의 사업을 추가했다.

창간 기념사업 중, 「조선 백과사전의 편찬 간행」에 관해서는 학문적으로 조선 문화에 기여할 바가 클 것이라 생각한 요코미조는, 경성대학 교수에게 제작 의뢰해 실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요코미조가 『경성일보』사장 재임 중에 일본이 패망하였기 때문에, 기념사업은 실현이 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전 직후의 『경성일보』상황
일본의 패전에 의해 한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사회는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경성일보사의 조선인 종업원이 중심이 된 경성일보 사원대회가 열려 『경성일보』를 한국인이 접수하여 신문발행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정보과장이었던 아베 다츠가즈(阿部達一)는 이같은 경성일보내 조선인 종업원들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사내가 혼란해지자 경성일보사 주변에 무장 일본군 100여명을 주둔시키고 총을 들이대며 경성일보 사원들을 위협하며 신문발행을 종용하였다. 또한, 아베 정보과장은 경성일보를 기존의 상태로 존속시키도록 사장인 요코미조에게 지시하였다.

일제 패망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군사적 압력에 반발한 조선인 종업원들은 신문제작을 거부하고 파업을 일으키며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1945년8월 17일자의 신문은 발행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8월17일에 일본에서는 전쟁 패망에 따른 내각 교체가 이뤄졌다. 17일에 일본에서 발표 된 「스즈키(鈴木) 내각이 계관해서 히가시 쿠니미야(東久邇宮)내각 성립」이라는 정보를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이것을 중대한 소식이라고 생각한 요코미조는 이 소식를 어떻게든 한국내의 일본인에게 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문사 직원들과 인쇄 종업원은 파업을 하고 일본군의 무력진압과 위협으로 인하여 모두들 귀가한 뒤, 출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8일자 신문 발행도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17일과 18일의 양일 간은 신문발행이 불가능하였는데, 요코미조는 히가시 쿠니미야(東久邇宮)내각 성립 뉴스를 빠르게 전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관동 대지진 때, 등사판 인쇄를 하여 위험상황을 알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등사판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신문을 발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경성일보』의 마지막 사장, 요코미조 미츠데루(横溝光暉)가 수기로 써서 서울시내 일원 전봇대와 담장에 붙혔던 원본 사진


이렇게 해서, 1장짜리 등사판 벽보신문을 만들어 서울시대의 전봇대와 벽에 붙이도록 한 후, 요코미조도 1부를 가지고 그의 숙소인 조선 호텔로 돌아왔다.
『경성일보』는 8월 19일자 신문부터 정상적인 발행에 들어갔는데, 19일자 발행 신문 「사고」란에는「본보는 제종의 정세에 의해서 17일부와 18일부는 휴간했지만, 19일부터는 통상대로 발행합니다. 쇼와(昭和) 20년(1945) 8월 18일 경성일보사」라는 내용이 게재 되었다.


『경성일보』 폐간 경위가 일본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나?
요코미조 미츠데루(横溝光暉) 경성일보 사장은 일제 패망 28년이 지난 1973년, 이같은 내용을 일본「내정사 연구회」에서 경성일보 사장 재직 상황의 증언을 포함해, 총7회에 걸쳐서 증언한 바 있다. 아래의 사진은 1945년 8월18일에 발행된 1장짜리 등사판 벽보신문으로서 요코미조가 1부를 보관하고 있다가 증언 당시 원본을 일본신문협회에서 보관해 온 사본이다. 등사판 벽보신문은 통상대로 발행된 신문이 아니기 때문에 구독자에게는 배부되지 않았고 서울시내 일부에만 붙여졌다.

『경성일보』는, 1906년 9월 1일에 창간되어 패전 후, 10월31일 (1945년11월 1일부 신문)까지 (11월 1일부터 12월 11일까지는 한국인에 의한 발행) 2일간만 휴간되고 발행되었던 식민지기의 조선 최대신문이었다.

경성일보사의 일본인 직원들은 11월말까지 일본으로 돌아가도록 허가 명령이 내렸기 때문에, 패전 후에도 『경성일보』를 계속해서 발행할 수 있었는데, 이것 또한 요코미조의 고집스런 발행의지와 조선총독부의 아베 정보과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경성일보 사원들에게는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3개월 분 월급이 미리 지급되어 그 이후 자연스럽게『경성일보』는 한국인 손으로 넘어와 11월1일부터 12월 11일까지는 한국인에 의해 발행되다가 소멸되었다.

요코미조는 원래 패전과 동시에 『경성일보』을 폐간하려고 했지만, 한반도에 남아 있는 일본인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고 이들이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발행을 계속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요코미조는 기관지의 역할은 오로지 자국민 보호와 민족주의 정신으로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경성일보』를 10월 31일자 (지령13,746호)까지 발간을 계속한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 관방총무과장을 역임했던 야마나 사케오(山名酒男)가 패전 3개월 후에 쓴 『조선총독부 종전 기록』(朝鮮総督府終政の記録)에 의하면, 「11월1일 이후 경성에 있어서 당시의 방자신문(일본어 신문)이었던 경성일보사는 조선인이 경영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종전처럼 일본인에 대한 주지사항을 일반 일본인에게 철저히 하는 것은 일본인 지원회의 계시에 기대는 수 밖에 없어서 관민이 모두 다 다대한 불편을 통감하도다」라는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1945년 패전직전의 『경성일보』 규모는 직원 약 2,000명이고 이중에서 조선인이 100여명이었다. 발행부수는 41만부, 자매지 『경성일보 소국민신문』(京城日報少国民新聞) 약 39만 부, 월간잡지『소국민』(少国民) 약 10만부, 『경성일보 화보 』(京城日報画報) 3,500부였다.

『경성일보』는 조선에서의 가장 많은 발행 부수를 자랑하였고, 일제식민지 한국 언론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짐과 동시에 언론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다시 말해, 『경성일보』는 창간부터 통감부와 총독부의 지원을 받고, 규모확대를 한 결과, 조선 총독부의 통제 하에서 조선에서 언론을 독점하는 지위까지 누렸던 것이다.

이렇게 『경성일보』의 규모가 확대된 배경으로는 총독부의 전면적인 협력이 수반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를 조선총독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도기관으로서 인식하였고, 강점기의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대규모의 보도기관으로서 육성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내 최대규모의 신문사로 군림할 수 있었다. 

박인식

이천시 출생. 중앙대학 대학원(신문방송) 언론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 Berliz에서 수학. 일본국립 야마구치 대학 동아시아 대학원 박사 졸업(학술박사). 일본 도쿄 가쿠게이 대학(東京学芸大学)을 거쳐 중국 동북사범대학, 창춘(長春)이공대학 교수 역임. 현, KCJ 국제관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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