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일 잘못됐다. 양국정부의 무효화 선언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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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일 잘못됐다. 양국정부의 무효화 선언 시급
  • 박인식 KCJ 국제관계연구소 소장
  • 승인 2015.10.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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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학술박사
한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본, 중국등에서 교수활동을 전개했던 이천출신의 박인식 박사가 최근 일본에서 수집한 외교문서를 통해 을사늑약일이 1905년 11월 17일이 아니라, 11월 18일이었음을 밝혀냈다. 다음은 박인식 박사가 을사늑약 체결일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또는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며, 한국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조약의 내용과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의 성격을 들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제2차 일한협약(第二次日韓協約) 또는 을사협약(乙巳協約)이라고 부른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1905년 7월 일본 수상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William Howard Taft 육군장관과의 가츠라(桂太郞)-태프트(Taft–Katsura Secret Agreement)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英日同盟條約)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같은 해 9월,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통해 러시아로부터도 대한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종속시키기 위한 수순을 밝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행한 것이다.

지금까지 을사늑약 날짜가 1905년 11월 17일로 기록되어 알려져 있지만,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을사늑약일은 하루 뒤인 1905년 11월 18일 인 것으로 밝혀졌다. 글쓴이(박인식 박사)가 일본에서 수집한 외교문서에 의하면, 11월 17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사전에 작성해 놓은 문서의 날짜이고, 실제로는 박제순 외부대신과 일본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가 최종적으로 조약문에 직인을 날인한 날짜는 11월 18일 밤 1시가 넘어서 이뤄졌다.

일본정부는 1905년 10월 27일, 일본정부의 내각회의에서 이를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또한, 이 내각회의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특명 전권대사로서 임명되었다. 이토 전권대사는 11월 9일 조선으로 건너 와 바로 다음날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오전 11시, 일본공사 하야시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소집해 예비교섭을 시도했지만, 대신들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 것을 요구하였다(「保護条約た締結」 일본외교문서). 그래서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어전회의는 경운궁에서 저녁에 열렸지만, 조약체결 반대의견이 강했기 때문에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토 대사는 이날 밤 8시경,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주차군 사령관과 함께 고종을 참내하고 어전회의 재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병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전회의 대신에 내각회의 형식으로 열리게 되었다. 이토와 하야시, 그리고 주차군 사령관과 그 외 무관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내각회의 장소인 궁궐은 일본 병사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었고 이토와 하야시는 대신들을 협박하고 위협하였다.

삼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토는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의 찬・불 의견을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도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를 표명하였고, 학부대신 이완용은 찬성을 하였다. 그밖에 대신들은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토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대신들을 한 명씩 따로 만나 교묘한 방법으로 설득과 협박을 통하여 이들을 조약체결 찬성 쪽으로 유도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보호조약 체결을 찬성하게 된 대신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등이 주축이 되어 보호조약 체결이 진행되었다. 법부대신 이하영은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보였으나 조약 체결 과정에서 적극 찬성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이하영은 처음에 반대한 사실 때문에 을사5적에서는 빠졌지만 이하영을 포함하여 을사6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토는 보호조약 체결을 찬성하는 대신들이 제시한 내용을 미리 작성해 놓은 조약안을 그 자리에서 수정하고, 밤 11시 30분에 하야시 공사와 박제순 외부대신에게 조약서에 기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사전에 외부대신 직인을 사전에 빼앗아 일본 공사원에게 보관하였고, 직인을 가져와 외부대신을 협박하여 멋대로 날인을 시킨 시각은 18일 오전 1시반 경이었다. 을사늑약 체결은 이토 히로부미가 사전에 작성해 놓은 1905년 11월 17일자 조약서에 박제순 외부대신과 일본의 하야시 공사가 기명을 했기 때문에 서류상의 11월17일자로 체결된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외부 대신의 직인이 날인된 것은 1905년 11월 18일 오전 1시 반경이라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약이 체결된 후,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관에서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문서인 「伊藤特派大使日韓新協約調印始末」에 의하면, 「하야시 공사, 박 외상과 협약에 조인을 끝낸 것은 오전 1시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날, 18일에 하야시 공사가 일본 가츠라 외무대신에게 보낸 대신에게 전보로 보낸 문서인 「日韓新協約調印ノ事情報告ノ件」에서는 「이토 대사는 수정안을 취합하고 결국 확정안을 정하고 나서 이지용 및 이재열에 의해 (고종에게)주상하고 재가를 얻어 조인을 완료한 것은 오늘 아침(11월18일) 1시 30분이였다」고 보고했다. 또한, 伊藤博文傳(下巻)』(統正社刊、1943年)에서도 「하야시 공사와 박(제순) 외상과 해당 협약에 조인을 완료했던 것은 오전 1시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호조약의 체결일이 1905년 11월 18일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관련 문헌에는 11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제2차 한일 협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의 논리에 따라 황제의 밀서 등은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약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무효임을 확인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이 한일병합을 무효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확한 날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당시 무력과 강요에 의한 조약 성립은 무효라는 국제 협약의 관례를 조사하고 관계 법령에 따라 양국 정부와 명확하게 무효화를 별도로 명문화해야 한다.

이미 한일 역사학자들이 한일병합 무효화를 선언한 바가 있지만 실질적 효력을 발하기 위해서는 양국정부가 나서서 을사보호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화를 공식 선언해야 한다. 을사보호조약은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면서 식민지화되는 법적 근거가 되기 때문에 두 조약의 무효화는 한일간의 역사청산과 올바른 역사정립을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박인식

이천시 출생.
일본학술박사.
KCJ국제관계연구소 소장
현재 명성황후의 시해 일본내각개입 연구중
중앙대학 대학원(신문방송) 언론학 석사
일본국립 야마구치대학 동아시아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일본 도쿄가쿠게이대학을 걸쳐 동북사범대학, 창춘이공대학 교수역임.
                             저서: 일제의 조선통치와 언론
                             일제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정치・언론 상호 관계
                             침략전쟁(번역서)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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