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아 보중가 누니스 글/에스페란자 발레주 그림/길우경 옮김/ 펴낸곳 비룡소
‘오빠’처럼 집안의 기대를 받는 ‘대장’이 될까?
얼굴이 예뻐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언니’가 될까?
여행 가방처럼 큰 노랑 가방 안에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녹슨 옷핀, 진짜 수탉과 마음에 드는 이름을 적어 놓은 메모지 몇 장이, 가방 옆에는 날아오르고 싶은 실타래에 묶인 연 하나가 그려져 있다. 노랑 가방의 표지 그림이다. 주인공 라켈이 운 좋게 얻은 노랑 가방 안에 담아둔 것들이다. 어른들 눈에는 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이 물건들과 라켈이 어떻게 마음을 나누며 성장하는지 알게 된다면…. 이 책을 읽고 나자 나는 내게 딸이 있다면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라켈은 엄마가 더 이상 아기를 원치 않았을 때 태어난, 말하자면 엄마 인생에 ‘방해물’이라는 말을 언니나 오빠로부터 듣는다. 식구 많은 집에서 라켈은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리다는 것만으로 무시당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빠’처럼 집안의 기대를 받으며 모든 결정권을 갖는 ‘대장’이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이어 라켈은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라켈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버려서 얄미운 언니나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라켈을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어느 날 라켈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그렇담 아무도 내게 화를 내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소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그럴 듯하게 꾸며낸 것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라켈은 자신이 쓴 글을 읽은 가족들에게서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말을 듣자 자신의 욕망들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래서 라켈이 찾은 그 장소가 바로 노랑 가방이다. 우연하게 길에서, 집에서 발견한 수탉, 옷핀, 우산, 메모지들은 바로 라켈이 이루고 싶은 욕망의 상징물들인 것이다.
남자로 상징되는 수탉은 이렇게 말한다. “밤낮으로 그녀들을 다스리는 일에 진저리가 났다고 설명했지만 대답은 이랬어. ‘당신이 우리들 주인이에요. 당신이 우릴 위해서 모든 걸 결정하는 거예요.’ ‘내 말 잘 들어 봐. 알은 네 것이야. 이 생활은 너의 삶이고, 네게 가장 좋아 보이는 일을 마음대로 해 봐.’ 그러자 그녀들은 울기 시작했고, 식음을 전폐하고 비쩍 말라갔고, 죽기까지 했어. 그녀들은 온종일 명령하는 주인을 갖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지.”라고 말한다. 또한 “고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암탉을 책임져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나는 나일뿐이야”라며 닭장을 도망쳐 나온 이유를 라켈에게 말한다.
이 책에서 망가진 우산은 여자를 의미한다. 얼굴이 예뻐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라켈의 언니이기도 하고, 금새 싫증낼 옷을 그래서 자꾸 사들이는 친척 아줌마이기도하다. 망가진 우산인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아야’라는 말뿐이다. 그녀에게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는 라켈은 화가 난다. “망가진 건 그녀의 입이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란 말야.” 라켈은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어 이야기의 끝을 만들기 위해서는 망가진 그녀를 고쳐야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만물 수선 가게에서 새 것처럼 고쳐진 우산에게서 라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단지 예쁘기만 한 것은 그리 가치가 없고,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질 것 같은 생각에 그녀는 낙하산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녀는 창밖으로 뛰어 내렸으며 다쳤다는 것이다. “무모한 모험이구나!” “위험한 모험이었지. 예쁜 것만으로 단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지루함만큼이나 위험한 거였지.”
점점 무거워져만 가던 노랑가방이 라켈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점점 가벼워진다. 연은 남자애들이나 하는 놀이라고 여겨 하지 않았던 라켈은 해변에서 연을 날린다. 마침내 라켈은 우산과 수탉을 떠나보내고 글을 쓰고 싶은 욕망만을 남겨둔다. 그리고 어느 날 불쑥 커지기 시작할 지도 모르는 어떤 욕망에 침을 놓기 위해 옷핀만을 노랑 가방 안에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