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CO 40 年의 회상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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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CO 40 年의 회상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이천뉴스
  • 승인 2008.04.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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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月 1日로 포스코가 40주년을 맞았다. 창업의 대열에 참여하여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살아온 창업동지들은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34名으로 시작된 창업의 역사가 이제 19名의 生存者만 남게 되었다 삼가 他界한 분들의 명복을 빈다.

1968年 4月 1日 출범한 포스코는 그동안 매년 10% 以上 성장해왔다. 창업당시 16억원에 불과했던 자산 규모는 지난해 30조4928억원으로 1만 9000배 이상 늘었고, 포항제철소 1기가 가동된 1973년 416억원 이였던 매출액도 올해 24조원(포스코 단일 기업 기준), 자회사, 해외투자사를 포함한 연결재무구조는 33조를 넘을 것으로 전망 된다.

지난 40년간 포스코가 생산한 철강재는 5억 5085만톤으로 중형승용차 5억 800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분량이다. 포스코에서 생산된 철강제품은 자동차, 가전, 조선, 기계 등 국내 각 분야의 주력 기업에 공급되어 이 기업들이 급성장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포스코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2018年 그룹 매출 100조원, 생산규모 5000만톤이라는 10年 후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원료 철광석과 유연탄 가격의 급등, “미탈 아셀로” 철강 회사로 대표하는 무분별한 국제적인 인수, 합병(M&A) 의 도전을 극복하기가 결코 용이 하지 않다. 이날 기념식장에서 발표된 박태준 명예회장의 경고는 깊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 포스코가 지금의 위상보다 한 단계 더 올라 갈 것인가 , 아니면 정체나 퇴보를 할 것인가 엄중한 기로에 서 있다. ”
한편 지나간 40年을 반추 할 때에 함께 기억하고 남겨두어야 할 주요한 대목들이 있어 여기에 삼가 소개를 드린다.

첫째는 1971년 10월 31일을 기억 하고 싶다. 이날 熱延非常이 해제되었다. 열연제품이란 제철공장의 핵심이 되는 제품으로서 「트레일러」에 대형 두루마리 형태로 실려져 각지로 운송되는 광경을 일반산업도로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가 있다. 이 핵심 되는 열연공장건설이 3개월 이상 지연 되게 되었다. 그 당시는 공사공기지연은 보통으로 생각되는 시절 이였다.

자제물건을 공급하고 외국의 메이커 및 공급자들은 제작연기의 불가피성을 역설해 마지않았다. 원료공급사들도 공장건설이 지연될 것을 보면서도, 선투자해서 원료광산을 개발 할 수 는 없노라고 난색을 표명했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장 건설을 “모토”로 내걸었던 포스코로서는 공장건설의 사활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에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에 공기지연은 없다고 선언하고 지연 시에는 손해배상을 하겠노라고 각서를 쓰고, 건설비상을 선포하고 24시간 근무 돌관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루 “레미콘” 타설 300㎥가 기준인데, 공기만회를 역순으로 계산할 때 필요량은 700㎥를 목표로 하고 죽음을 무릅쓴 총력전을 전개했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잠이 부족한 레미콘 운전수가 길가에 대기 한 채 잠들면 일일이 깨워 커피한잔, 주스한잔으로 격려하고 목표달성에 총력을 경주 하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모두의 생각이 목표 설정의 불가피성에 대한 이해와 또 목표가 어느 정도 가시권內에 들자 우리 민족의 특질인 “한번 해보자” 는 신바람이 불어 당기자 무서운 폭발력이 일어났으며 지연공기를 3개월 이상 앞당기게 되었고, 기기공급업자들에게 약속을 지켰고, “포스코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낸다” 는 신화가 생겼다. 이로서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관행이 새로이 쓰여 졌으며, 우리직원들에겐 “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뜻을 모으는 곳에 不可能은 없다”는 신화를 남기게 되었으며 “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것 (Facta Sund Servanda )은 포스코의 기본 철학이 되었다.

두번째는 1978年 8月 중순이다.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날 “검은고양이, 흰 고양이론”으로 이념투쟁을 종식시키고 실사구시의 국가발전 戰略을 새로이 제시했던 중국의 등소평주석이 일본의 “키미츠” 제철소를 시찰하고 있었다.

일본 측 대표로는 이나야마 회장이 손수 안내했으며, 정성껏 설명을 드려 마지않았다. 공장시찰이 끝나고 영빈관에서 잠시 땀을 드리울 때, 등소평주석이 시찰소감을 곁들여 말했다.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의사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바라건데 한국의 포항제철과 똑같은 제철소를 우리중국에도 지어 주기 바란다. 이에 대해 이나야마 회장이 답한다. 물자, 자금, 기술면 모두 지원가능하다 그러나 중국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없다니? 중국천지 다 뒤져도 박태준 회장같은 리더십은 없다. 탁월한 리더십의 접목 없이는 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하다.

깊은 사색에 잠겼던 등주석이 답한다. 그러면 박 회장을 수입할 수 없겠는가? 아직도 등주석이 살아있는 듯 그 위광효과가 여전하다.

몇 번의 機會가 있어 박 명예회장 모시고 중국 당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매번 중국당국은 “의전” 절차가 단순히 철강계의 귀빈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한나라의 최고 국빈에 대한 의전 그것 이였다. 참으로 감동적인 인상 깊었던 순간이었다. 관시를 중시하는 중국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다각도로 활용 가능한 우리의 좋은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는 1990년 11월 16일이다.

이날 미테랑 불란서 대통령이 그의 친형 르베르 미테랑을 통해 박태준 회장에게 “르종.드뇌르” , 불란서 국가최고 훈장을 보내 왔다. 그의 요지는 이러하다. “귀하는 나라가 전란에 휩싸여 위태로울 때 군인으로 일선을 지켰고, 가난의 질곡을 벗고자 노력할 때 산업의 지도자로 헌신했고, 또 나라가 새로운 비전을 필요로 할때에 정치인으로 조국의 부름에 헌신 했습니다. 귀하의 일생은 오로지 조국에 대한 열정, 헌신, 봉사 그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훈장이었으며 이와 같은 평가는 포스코 공장건설의 신화가 그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불란서 사람들이 문장을 참 잘 다룬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들이 존경하고 또 높이 평가하는 한 인격체의 일생을 군인시절, 기업인시절, 정치인 시절로 구분하여 간결하면서도 함축성 있게 정리 한 것이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하였다.

네번째는 1992년 7월 20일 일이다.

이날 러시아, 모스크바 大學 샤도브니치 총장이 포항공장을 방문하여 공장시찰을 한 후 별말이 없던 이 분이 孝子住宅團地를 시찰하면서 아연활기를 띠고 세심한 관찰과 관심을 표명하였다. 언제 지었으며 입주자의 신분이 어떠하며, 소유의 형태는 어떠하며, 값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이 모든 것이 회사나 국가 소유가 아니고 自家住宅이라는 것과 유치원에서부터 大學에 이르기까지 교육시설을 완비 했으며 특히 工場착공이전에 종업원의 주택부터 준비했으며, 그것도 공동묘지 땅을 개발하여 30년만에 가장 아름다운 또 친환경적인 이상적인 住宅단지를 마련하였다.

이 모든 사실을 파악한 후 총장은 깊은 감회어린 표정으로 독백을 한다. “ 1917年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레닌동지가 그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그토록 이룩하고자 했던 理想鄕을 여기 POSCO에 와서 보게 됩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박태준 회장의 선견지명과 리더십에 존경을 드립니다. 포스코 주택정책이 그 결실을 드러낸 한 순간이었다.

다섯째, 1992년 10월 3일이다.

이날 朴회장은 검은 상복을 입고 가족과 수행원 약간명만을 대동하고 국립묘지 朴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향을 살으면서 포스코 2100만 톤의 완공보고를 드렸다. 이 보고는 대단히 뜻이 깊고 역사성 있는 文件이기에 여기에 그 전문을 싣는다.

<각하! 이제 마쳤습니다.>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 제철소 건설이 필수 적이 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 시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 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4명의 창업요원 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열세 차례에 걸쳐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100만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 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으며, 우리나라는 6대 철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 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명이 땀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새로울 뿐입니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다만 머리 숙여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각하! 염원하시던 '철강 2,000만톤 생산국'의 완수를 보고 드리는 이 자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던 근영·지만군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녀분들도 이 자리를 통해 오직 조국근대화만을 생각하시던 각하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각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더욱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저 또한 옆에서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잔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엎드려 바라오며, 삼 가 각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올림
여기에는 지도자의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한번 약속된 수명사항은 몇 십 년이 걸려도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는 대장부의 기개, 지도자의 결단에 흔쾌히 따르는 수만 장졸들의 열의와 헌신, 이 모든 것이 응어리진 한 편의의 대서사시이다.
일찍이 제갈공명의 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선비가 될 수 없노라고 우리의 선조들은 강조했다.
감히 제안한다. 출사표도 의미가 있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청암 박태준의 준공보고를 읽고도 눈물이 없고, 감동이 없으면 그것은 魂이 없는 자 라고......함께 노력하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뜻을 키우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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