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자는 공주다

2007-08-10     길일행 동화작가

아네스 드자르트 글/
조현실 옮김/ 신민재 그림/
문학과 지성사

학교에서 간혹 남학생들이 자기 또래의 여학생을 가리키며 ‘쟤는 공주병이야’하는 소리를  듣는다. 심지어 나 역시도 열 살 난 남자 아이로부터 ‘선생님 혹시 공주병 아니세요?’라는 장난 어린 말을 듣고 처음에는 내심 당황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은 어떤 때 이런 말을 할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런데 바로 내 주위에 있는 어린 남학생들과 같은 또래의 이 책의 주인공 이반이 진정 만나고 싶은 여자란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예쁜 공주님’이다. 물론 ‘공주병’에 걸린 여자가 아닌 진짜 ‘예쁜 공주님’말이다.


이반은 발이 예뻐야 진짜 공주일거라는 얼마간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소년이 친척 할머니의 발 관리 센터에서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을 넘어 차츰 여성성을 어떻게 이해하며 잘 드러나지 않는 내면까지도 보게 되는지 그 과정을 짜임새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엄마란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이며, 소녀시절과 청춘이 있었던 그리고 그 시간들과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의 입장에서 혹은 어린이의 입장에서 그런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란 쉽지 않다.    
이반의 엄마는 ‘나 자신을 위해 살 권리’를 찾기 위해 바깥에서 어렵게 일을 구한다. 그래서 학교가 쉬는 수요일마다(프랑스의 학교는 수요일에 쉰다) 엄마가 이반을 돌봐줄 수 없게 되자 이반으로 하여금 발 관리사인 친척 할머니의 조수로 일하게 한다. 이반은 지루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줄 만큼 얘기도 할 줄 모르는 친척할머니와 지내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지만 혹시 그곳에서 발이 예쁜 진짜 공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이반의 기대와 달리 발 마사지를 받으러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나이든 할머니들이다. 칠면조처럼 축 늘어진 피부, 콩알만 한 주근깨들, 길고 누런 이빨을 한 할머니들의 똑같은 두꺼운 모직 스커트를 입고, 똑같은 핸드백들, 똑같은 반지들, 발가락 때문에 똑같이 뒤틀려 버린 신발들을 보며 공주를 찾겠다던 이반은 어느새 지겨움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반은 할머니들의 발이 아픈 이유가 나이 들어서도 예쁘게 보이려고 굽이 있는 신발을 신기 때문이라는 친척 할머니의 말을 듣고는 그 할머니들에게 애잔함을 갖게 된다.


이반은 이렇게 친척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늙었다는 것만으로 한결같이 똑같이 보였던 할머니들에게서 그녀들의 발만큼이나 고단했을 삶을 볼 줄 알게 된다. 또한 친척 할머니가 부지런하고 융통성 있게 손님들을 다루는 것을 보며 그녀에 대하여 존경심마저 갖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가 왜 발 관리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반은, 그녀가 다 말해주지 않았어도, 한 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가슴깊이 아픔을 묻어두고 살아왔으며, 가난 때문에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접고 발 관리사가 되어 가족의 생계를 돕는 고단한 삶을 살아왔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그려진 여자는 자기 인생을 찾는 이반의 엄마와 친척 할머니 그리고 여자 친구 이렌이다. 세대가 다르고 각기 기질이 다른 이 세 명의 여자를 통해 작가는 ‘발이 예쁜 여자가 진짜 공주’일거라는 환상을 가진 이반이 곁에 함께 있는 여자들에게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특히 늘 함께 축구를 하고 헐렁한 청바지를 즐겨 입는 씩씩한 여자 친구 이렌이 맨발로 열심히 춤을 추다 발에 물집이 잡혀 터질 듯하자 이반은 이렌을 업고 할머니에게로 가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지금 공주를 납치하고 있는 중이라고’ ‘공주병’이라는 말이 떠도는 교실에서 공주와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길일행  /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