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보훈지청(지청장 김호열)은 경기도 출신 2월의 독립운동가로 화성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한 차병혁 선생을 선정하였다.
차병혁 선생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성(仲成)이다.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長安)・우정(雨汀)면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다.
선생은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 듣고 4월 3일 아침 일찍 석포리(石浦里) 이장인 차병한・차희식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되어 있으니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한편 자신은 오전 10시 30분 경 차병한과 함께 어은리(漁隱里)에 있는 장안면 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독립만세 운동 계획을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 20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이자 김현묵이 독립만세 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였고 선생은 곧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차병한・이영쇠 등과 함께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어서 차인범 등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곳의 건물・집기류・공문서를 파기하고 계속적으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는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 실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