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광복 60주년을 맞았지만 과거사 정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대통령직속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광복 후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민간인 집단 희생 등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정권마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껄끄러운 문제로 치부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 정권에서도 친일인명명단 공개와 관련해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있게 봐야한다”한다거나 대일관계에서도 실리외교를 표방하며 “일본에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는 등 과거사 정비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이처럼 과거사 정리 작업이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친일파들은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일제강점기 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과거 속에 묻혀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미발굴 독립유공자들의 행적을 찾기 위해 지난 30년을 추적해온 이가 있다.
정병기(51)씨는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이 잡듯 뒤져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찾아냈고 주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사건의내막>은 정병기씨를 만나 정용선 선생의 독립운동 발자취와 지난 30년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를 들어봤다.
정씨 “증조부는 일제시대 군자금 모금 벌이다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졌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 증언 등 항일운동 행적 드러났음에도 보훈당국은 외면…수형인 명부 정부에 의해 소각돼” 분개
“증조부는 일제시대에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한 혐의로 악명 높은 경성형무소에 투옥돼 숨을 거뒀다. 이는 일본형무소장인 제정호적에 기록돼 있다. 증조부로 인해 우리 집안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일가족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냈고, 증조모를 개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발각돼 증조모는 굶어 죽었고, 조부는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전전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사셨다. 제정호적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 증조부의 항일운동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적힌 수형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30년을 하루 같이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병기씨는 “광복 60주년이 무색할 만큼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발굴작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독립운동가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발굴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데 그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직접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성토했다.
정씨가 증조부의 명예회복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는 경찰관으로 복무하던 중 1980년 강도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찔려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으로 연금을 받고 있다. 더욱이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증손자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정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을 찾아다니면서 보상금 때문이라는 둥, 미쳤다는 둥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그간 마음고생을 털어놨다. 그는 “솔직히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신 아버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증조부의 명예회복”이라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은 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발굴이 이뤄질 때 참의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념을 피력했다.
그가 증조부인 정용선 선생의 발자취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조상들의 성묘조차 갈 여건이 안됐지만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데리고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묻혀있는 증조모에게 성묘를 갔다. 그러나 증조부의 산소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고 아버지로부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막연하게나마 증조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면서 증조부를 찾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시 상황
을 물었고 기구했던 가족사를 알게 됐다. 친인척들 및 주변인들의 증언과 30년간 증조부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끝에 그가 밝혀낸 정용선 선생(1883년~1928년)의 행적은 이렇다.
정용선 선생은 1983년 12월17일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의성, 풍기, 울진, 영덕
, 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만주에 있는 독립군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척곡교회(1909년 설립, 2006년 6월19일 등록문화재 제257호로 지정) 창립자 김종숙 목사와 논의해 독립군에게 보냈다.
그러던 중 당시 거부들이 모여 살았던 충북 청주군(현 청원군) 양석면 도원리에서 만석군의 집을 털다 발각돼 1년 만에 다시 경북으로 도망을 나왔다. 그러다 1916년 갑자기 종적을 감췄고 10여년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친인척분들이나 주변인들 모두 증조부님이 군자군 모금 운동을 했다고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며 “당시 경성형무소는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투옥된 던 곳으로서 고향이 경북인 증조부가 경성으로 압송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군자금 모금 운동의 근거지였던 척곡교회의 김종숙 목사의 손자 김명성(83)씨도 “조부로부터 정용선 선생과 함께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바 있다고 들었다”고 인우사실 증명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김명성씨는 인우사실 증명서를 통해 “척곡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비밀 결사 장소로 활용되었다. 군 자금 모금은 관내 친일파나 지역거부들의 집이 대상이었는데 야간에 침입해 금품을 강탈, 폭력을 행사하여 수탈하였고 소나 가축 등 금품환전이 가능한 모든 것들이 대상이었다고 조부로부터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정용선 선생이 군자금 모금 운동은 물론 일본군과의 항일 전투에 참가해 싸우던 중 체포됐다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정용선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군 자금 모금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경찰과 수차 격돌한 바 있고 관공서 습격과 방화 등을 수시로 시도했다고 한다.
또한 의병대장 석태산과 함께 재산전투에 참가해 동지들과 전투를 직접하며 항전했다는 것. 그러나 물자부족과 병력의 열세로 패해 후퇴, 석태산 의병장 가족은 강원도 평창 사거전 교회로 피신시키고 석태산, 정용선, 김명림 등 잔여병력은 소백산으로 이동 침입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하던 중 일본군의 간교(만나 협상 요청)에 의해 협상장에서 체포되어 석태산 의병장은 현장에서 처형당하고 정용선은 소백산에서 체포돼 경성으로 압송된 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김명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0년을 복역하고 만기 출소 후 독립운동본거지인 척곡교회로 돌아와 조부와 함께 거주한 사실이 있다고 전했다.
김씨는 정용선 선생의 가족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히 증언했다. 그는 “정용선의 가족들은 일제의 모진 박해와 고문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고 정용선의 처에 대해 집안 일가친척의 주선으로 개가하였다는 사실을 인근 주민으로부터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용선 선생과 달리 김명림씨는 수형인 명부에 기록이 남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정씨는 김명성씨의 증언처럼 증조부의 항일운동 여파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제는 수시로 찾아와 감시와 고문 등의 탄압을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집안어른들이 증조부를 족보에서 파내고 증조모의 이름을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고친 후 야밤에 40리 떨어진 인동장씨 집안으로 개가시켰다는 것. 그는 그 근거로 인동장씨의 호적에 기록된 증조모의 이름 ‘정열이’를 제시했다.
정씨는 기구했던 가족사를 설명해 나갔다. 증조부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딸은 병으로 죽고 아들(조부 정덕수)은 증조모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인동장씨 집안은 모진 박해를 받았고 증조모는 초가집에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조부는 집을 나와 큰아버지집 근처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여전히 일본군의 엄한 감시를 받았다. 조부는 결국 광산에서 일을 하다 폐병으로 사망했고 당시 7살이었던 아버지(정건순)는 5살인 남동생을 데리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어머니를 만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게 됐다는 것이다.
정씨는 “아버지는 배움이 없어 글을 모르신다. 증조부를 시작으로 계속된 일제의 탄압은 해방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생체기가 되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며 “이는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친일파 후손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은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자 오랜 세월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해갔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정씨는 지난 30년간 증조부의 활동근거지로 알려진 경북 봉화군 일대의 모든 면사무소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경찰관으로 복무하는 도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 십리를 오가며 기록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10년이 흐른 후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다. 또한 증조부 생존 당시 소년이었던 90대 노인의 증언도 확보했다.
보훈처 “독립운동 사실 검증돼야 서훈 추서”
그러나 보훈당국은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정씨는 포기하지 않고 1989년부터 수형기록을 찾기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관련자료가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이에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고 “수형인 명부는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폐기됐다”는 답신을 받았다. 정씨는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느냐”며 “정부가 자료를 없애놓고 그 후손보고 그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에 도움을 요청,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보내 수형인 명부가 들어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했다. 그러나 증조부의 항일행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으나 이 역시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정씨는 “정부는 미발굴 독립유공자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이분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다. 국가가 계속 외면한다면 향후 행정소송
등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씨의 ‘정용선 선생 독립운동 관련 자료발굴과 재신 요청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관계자는 지난 7월28일 공문을 보내 “정용선 선생에 대해 자체적으로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자료를 수집해 2009년 3?1절 계기심사에 부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결과는 내년 2월말 경 통보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30년간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던 기존입장에서 일보 진전된 반응이다. 그는 “당시 이슬처럼 간 혼령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후손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부가 미발굴 독립유공자 찾기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