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해 주변국들이 긴장하고 있다. 북한의 이같은 도발적인 행동이 현실화될 경우 미국과 일본은 미사일 요격용 패트리엇(PAC3)을 실전배치하려 들 것이다. 이같은 양국의 미사일방어(MD) 협력 등 군사협력 움직임은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기엔 독일 월드컵의 함성이 너무 크다. 6월 25일이면 전쟁의 포성이 울린 지 56주년이 된다. 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이들은 하나둘 사라져 간다.
아프고 쓰라린 가슴으로 외로움의 말년을 보내는 탈북 국군포로(유영복, 증포동, 73세)의 한 마디는 우리를 각성케 한다.
“지금 같은 모내기철이면 북한에선 나 같은 늙은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모두 들로 나가야 합니다. 뙤약볕에 힘이 들더라도 못단을 나르든, 못줄을 띄우든 무엇이든 해야 하지요. 아프다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강제지요.”
그는 서울 숭문중 재학 시절 6.25를 맞아 인민군 의용군으로 입대해 전투 중 국군에 붙잡혔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나서 이번엔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중공군에 잡혀 국군 포로가 된다. 북한은 휴전 뒤에도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수많은 국군 포로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오지의 탄광으로 보내 일을 시켰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나 남한 출신의 차별을 겪어야 했다. 아내가 병사하자 자유를 그리워한 그는 결국 늙어 쓸 모 없어진 뒤에야 소홀해진 감시를 뚫고 6년 전 북한을 탈출해 귀순했다.
정착금으로 방을 얻고 연금으로 생활에 지장은 없지만 오랜 탄광 생활로 기관지와 소화기관이 나빠져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지금은 나아졌다는데도 수십년에 걸친 영양결핍으로 인해 누런 색깔로 흉하게 자라는 손톱이 그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웅변한다.
“통일이 돼서 북한의 자식과 손자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정부에서 잘 해줘서 큰 불만은 없지만 탈북자들 가운데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지어 북한 사회를 동경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정부가 직업 훈련이나 사회 적응 훈련에 더 신경을 써주기 바라고, 국민들도 탈북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따뜻이 대해주면 좋겠어요.”
북한이 참전자들을 우대하는데 비해 6.25 참전용사가 허술히 대접받는 한국의 현실이 이해 안 된다는 그는 국민들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기를 바랐다.
“지금의 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현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를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모르면 가르쳐야죠, 여기가 천국인 줄을. 또 편한 게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노동을 통해 건강한 몸과 강건한 정신이 자란다는 걸 알게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