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노동자 136명, 일본인 47명, 총183人 수몰사고로 수장
최근 조선인 강제동원을 소재로 한 하시마(端島) 해저 탄광, 섬이 군함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일명 군함도라 불렀다. 또한 조선인들이 끌려 가면 살아 남기 어렵다고 알려 져 지옥도라고도 불렀다.
군함도 해저 탄광에서의 굶주림과 가혹한 고초의 환경 속에서 강제동원 된 많은 조선인들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 상영되어 한국민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동원 된 800여 명의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배고픔과 위험 속에서 하루 절반 이상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중 질병, 익사, 탄광 사고 등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에 달하였다.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으로 2015년 7월 세계유산 위원회는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없이 신청한 하시마 탄광 등 23개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에 최종 결정되었고,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 하시마 해저탄광이 한국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 등, 주변국들이 반발하였다.
한편, 하시마 탄광보다도 더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해저에서 석탄을 캐는 도중, 수몰 사고로 183명(조선인 136명, 일본인 47명)이 몰살 당한 야마구치(山口)현 우베시(宇部市) 니시키와(西岐波) 앞바다에 죠세이 탄광(長生炭鉱)이 있다.
죠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해저로 연결된 갱도의 약 1km 바다 아래에서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쯤,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하의 최대 탄광사고로 183명의 사망자를 낸 대참사이었다. 국가총동원 체제하의 일본 국내에서의 최악의 탄광 재해로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사고원인이 되는 가스 폭발이나 갱내 화재가 아니고, 해수 유입에 의한 갱내 수몰사고이었다는 점과 희생자의 유체가 사고 발생 후, 75년이 지난 지금도 회수되지 않고 있는 것과 희생자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포함해 사망자 183명 중에 70%인 136명이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이었다. 죠세이 탄광에는 1939년부터 사고까지의 사이에 우베(宇部)시에서 최다 1,258명이 조선인 노동자이었기 때문에 「조선탄광」이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죠세이 탄광에는 일본인 노동자보다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 던 것은 당시 시모노세키∼부산간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전(戦前)의 야마구치 현은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역의 하나로 우베의 각 탄광에도 1912년부터 조선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래서 죠세이 탄광에 조선인이 특별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조선인 강제 연행조사 기록」 (朝鮮人強制連行 調査の記録)에 의하면, 죠세이 탄광은 해저탄층이 해안선에 따른 얕은 지층에 있어서, 얕은 지층에서 채굴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갱도로 내려가 가면, 바로 머리 위가 바다이므로 노동자들은 무너질까 봐 두려움에 떨었고, 작업을 멈추고 도시락을 먹고 있으면, 머리 위에서 어선이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나고, 스크루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똑똑히 들리므로 언제 천장이 무너질 것인가에 늘 공포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죠세이 탄광은 갱도가 얕아 바닷물이 들어 차는 사고가 다발해서, 일본인 광부에게서 매우 위험한 탄광으로 알려져 있어서 광부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 탄광의 상황을 모르는 조선인 광부가 많이 모아졌다고 한다.
「집단해외 도항선인 유부기록」 (集団渡航鮮人有付記録:1940.4)에 의하면, 1940년에 조선에서 484명이 연행되었고, 1942년의 수몰 사고까지 1,258명이 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죠세이 탄광의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에 대해서, 죠세이 탄광 수몰사고 당시에 일을 하고 있었던 3인, 아버지를 수몰사고로 잃었던 직계 유족의 증언, 게다가 사고를 목격했던 재일 코리안, 우베탄광의 일본인 노동자, 총 8인의 증언을 기록한 『아버지는 바다 아래(アボジは海の低、証言・資料集1) 』에 의하면, 조선 노동자들이 부관 연락선이 시모노세키(下関)에 내리면, 눈초리가 매서운 남자들이 감시하면서 지켜보고 있어, 눈알을 움직여도 맞을 것 같은 분위기이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자 마자 조선인들은 나무격자로 둘러 싸여진 곳에서 24시간 감시가 엄격한 숙사에 넣어졌다.
합숙소는 판자 건물로 만들어 져 있고, 탄광의 외측전체가 두터운 나무 판으로 둘러 싸여져 있었다. 탄광 출입문에는 한 군데 고참의 조선인이 문지기를 하고 있었고, 가까운 사무소에는 헌병 1∼2명이 상시 주재하면서 눈을 번뜩이고 감시하고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탄광의 갱내와 합숙소 사이의 왕복만이 허용되었고, 외출은 금지되어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해안 가까이에 이(イ), 로(ロ), 하(ハ)의 세개 동의 합숙소가 있었고, 강제연행 조선인은 도망칠 수 없도록 나무의 격자로 만들어진 합숙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조선인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서, 탄광전체가 나무의 널판장 속에 있어, 독신자의 기숙사는 더욱 높아 신장의 3배정도의 높이의 판자로 둘러싸져 있었다.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혹한 환경과 죽음의 공포로 탈주자가 생겼고 도망가다 잡힌 사람은 본보기로 처참한 징계를 받아야 했다. 일부는 화장실 구멍으로 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증언이 있었다.
죠세이 탄광에서 수몰사고로 가 나자, 즉시 탄광을 폐쇄하고 외부에 사고 관한 일체의 소식을 알리는 것은 금지 되었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아 자세한 사고 경위와 사망자 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재일 조선인운동사 연구회』(在日朝鮮人運動史研究会)의 회원이었던 치바(千葉) 현에 살고 있는 나가사와 히데(長沢秀)씨가 오래 전에 입수했던 것을 1990년 7월 7일자로 『朝日新聞』이 보도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죠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7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183명의 유해가 한구도 수습되지 못한 채, 일본 정부의 은폐와 무관심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지우려는 망각의 역사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선인 희생자들이 현재까지도 토코나미(床波)의 차가운 해저에 묻힌 채 잠들어 있다
그나마 민간단체인 「죠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共同代表:内岡貞雄、井上洋子、木村道江)와 「일본 죠세이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회장: 김형수)는 2010년부터 매년 추도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새기는 모임」에서는 2014년부터 희생자의 유골 수습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고, 갱구와 갱도의 위치를 확보하는 전문적인 조사에 착수하였고, 일본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유족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한일 관계의 유호적인 미래 관계를 위해서라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정부는 죠세이 탄광 수몰사고의 전면적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그리고 유골 수습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이와 더불어 한일 양국정부는 청산되지 않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희생자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망각의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희생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해야 하며, 한국정부는 조선인 유골 수습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