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호원읍 진암2리 출생
◆ 시카코 한인 상공회의소 이사장 역임
◆ 시카고 한인회 회장 역임
◆ 현재 미 중서부 한인회
8년째 이천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 수여
수구초심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 수구초심에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석균쇠(60세) 진암장학회 회장이다.
석 회장은 1948년, 장호원읍 진암리에서 태어나 장호원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갔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입을 줄인다고 떠난 고향이었다. 그리고 1977년, 서른 살의 나이에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캔서스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 가서는 대학에서 정보 시스템을 공부했다. 당시 컴퓨터란 개념조차 미미할 때이니 일찍부터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해보았지만 이민자로서 겪어야 할 장벽은 높았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시카고로 이주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용 재료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성공했다. 시카고 한인 성공회의소 이사장에 시카고 한인회장을 역임하다 지난 4월에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석패를 하긴 했지만 한인회 미주 총연합회장에 출마를 하기도 했다. 석 회장은 현재 미중서부한인회 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그러나 성공한 사업가로 미국에 살고 있는 그에게 잊지 못할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어릴 적 고향 장호원이었다. 그의 이런 고향 의식은 단순히 이민자에게 오는 향수병이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면서도 그의 고향에 대한 집착은 유난해 그 가난한 시절에도 한해에 한두 번씩은 꼭 별로 반기는 이 없는 고향을 찾곤 했다고 한다. 부모님들조차 그의 이런 애착을 특별하게 여길 정도였다.
시카고에 살던 그에게 어느 날 고국에서 IMF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때 석 회장은 뭔가 허전했던 마음의 정처를 찾았다. 궁리 끝에 작으나마 고향에 기여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고향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천에 있는 초중고생들에게 6개월에 한번씩 장학금을 주기 시작한 일이 올해로 8년째다.
처음엔 오해도 많이 샀다. 자신의 뜻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일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장학 사업은 자리를 잡아 갔다.
그가 지난 16일, 미국에서 이천으로 날아 왔다. 가장 큰 이유는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 한인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내친 김에 지난 4월 한인회 총연합회장 선거 때문에 만나지 못한 장학금 수여자들도 보기 위해서였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월드에 유대 강화와 사회봉사를 위한 클럽도 만들었다는 소식이 그를 조금 들뜨게 한다. 오늘 저녁에는 그들과 함께 시내 한 식당에서 닭갈비 파티를 열기로 했다.
“나누는 삶을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그의 순수한 뜻이 바라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